곤릴리어는 진짜 악녀였을까?
『리어왕』 속 권력과 사랑 사이에서 여성은 어떤 윤리를 요구받았는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리어왕』은 왕권의 분할과 가족 간의 배신, 진실한 사랑의 부정이라는 복합적인 주제를 품은 걸작이다.
이 작품의 중심에는 세 명의 딸이 있고, 그 중 첫째인 곤릴리어는 가장 강하게 ‘악녀’라는 이미지를 부여받는다. 그녀는 리어왕의 권력 분할 시험에서 아첨으로 점수를 따며 재산을 얻고, 이후 아버지를 배신하며 권력의 정점에 올라선다.
하지만 이처럼 단선적인 악의 서사로 곤릴리어를 규정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그녀는 단순히 잔혹한 권력 지향자였을까, 아니면 그 시대가 여성에게 요구한 불가능한 이상 속에서 생존하려던 한 인물이었을까?
이 글에서는 곤릴리어를 ‘악녀’라는 전통적 해석에서 벗어나, 권력, 가족, 여성 윤리의 충돌 속에서 살아남으려 한 복합적 인물로 바라보고자 한다.
그녀는 정말로 리어왕을 증오했을까,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려 했던 걸까? 그리고 우리는 왜 여성 인물에게 도덕적 완전함을 더 잔인하게 요구하는가?
곤릴리어의 선택은 아첨이었는가, 생존 전략이었는가?
극 초반, 리어왕은 세 딸에게 “당신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해 보라”고 요구한다. 이는 단순한 감정 표현의 요청이 아니라, 왕국을 나누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곤릴리어는 극적인 언어로 아버지를 찬양하며 큰 몫을 얻고, 코델리아는 진실만을 말하고 불이익을 받는다. 여기서 곤릴리어의 말이 거짓이라며 비난하는 독자가 많지만, 곤릴리어 입장에서는 그것이 유일한 ‘살아남는 방법’이었을 수도 있다. 여성은 왕권 계승의 주체가 될 수 없었고, 남편에게 귀속되는 존재로 살아가야 했다. 그 현실 속에서 ‘딸’로서 살아남으려면, 감정의 진실보다 전략적 언어가 필요했다.
곤릴리어는 리어왕의 감정을 만족시켜야 했고, 그에 실패한 코델리아는 모든 것을 잃었다. 이 장면은 단순한 ‘거짓과 진실의 대결’이 아니다. 오히려 권력자가 만들어낸 비윤리적 시험 앞에서 여성들이 어떤 선택을 강요당했는지를 보여준다.
곤릴리어의 선택은 아첨이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언어적 방패였다. 진실한 감정을 말한 자는 벌을 받고, 가공된 감정을 말한 자는 권력을 얻었다는 사실은 셰익스피어가 고의적으로 설계한 윤리적 아이러니다.
리어왕의 몰락은 곤릴리어의 악 때문이었는가?
곤릴리어와 리건은 왕권을 나눈 뒤 곧바로 아버지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그의 수행원을 축소하며 모욕한다. 많은 독자들은 이를 ‘패륜’으로 간주하고 곤릴리어를 악녀로 낙인찍는다.
그러나 리어왕 자신이 원인을 제공한 부분도 적지 않다. 그는 감정의 말로 권력을 나누었고, 실질적 통제권을 잃은 뒤에도 여전히 왕으로서의 대우를 기대했다. 그가 코델리아를 내쫓는 장면은 분노와 오만으로 가득 차 있고, 곤릴리어 역시 리어왕의 비현실적 요구와 모순적 행동에 분노했을 수 있다. 물론 그녀의 방식은 권위적이고 잔혹했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을 단순히 ‘악’으로 해석하기엔, 극 내내 리어왕의 감정적 폭력과 자기중심성도 상당한 역할을 한다. 곤릴리어는 리어왕에게 모욕을 주었지만, 동시에 스스로 감정에 기대어 정치를 하려던 왕의 몰락을 예고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녀는 아버지를 배신한 딸일 뿐 아니라, 감정과 권력이 충돌할 때 어떤 재난이 일어나는지를 드러내는 비극의 매개자였다. 이 점에서 그녀의 역할은 단순한 악인이 아니라, 극의 핵심 윤리적 질문을 던지는 인물이다.
곤릴리어는 권력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권력으로 이해했던 인물이다
곤릴리어는 권력의 언어로 사랑을 표현했다. 그녀에게 사랑은 따뜻한 감정보다, 책임과 구조 속에서 작동하는 힘이었다. 리어왕이 감정을 시험의 기준으로 삼은 순간, 그녀는 그 기준에 적응해야 했고, 이후 권력을 얻은 뒤에는 사랑을 제도화하는 방식으로 실천하려 했다.
그러나 그 방식은 인간의 본질을 무시하는 것이었고, 결국 가족 전체를 파멸로 이끌었다. 곤릴리어는 리건과 갈등하며 권력 투쟁에 휘말렸고, 에드먼드와의 관계는 감정이 아닌 정치적 동맹으로 작용했다. 그녀는 끝내 오만과 집착 속에서 무너졌지만, 그 안에는 사랑을 감정이 아닌 ‘역할’로만 이해한 인물의 비극이 존재한다.
그녀는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사랑했을 것이다. 다만 그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권력적 언어와 통제로 왜곡되었을 뿐이다. 우리는 종종 여성 인물이 권력을 추구하면 ‘악녀’라고 부르고, 감정에 충실하면 ‘순수’하다고 말한다.
곤릴리어는 바로 그 두 프레임 사이에서 윤리적 이중 잣대에 갇힌 여성 인물이었다. 그녀의 몰락은 단지 권력욕의 결과가 아니라, 감정과 역할, 사랑과 정치가 충돌할 때 여성에게 가해지는 불균형한 도덕의 무게를 드러낸다.
곤릴리어는 단순한 악녀가 아니다. 그녀는 감정보다 구조가 우선인 세계에서 살아남으려 했고, 사랑조차 권력의 언어로 배워야 했던 시대의 딸이었다. 『리어왕』은 그녀를 통해 묻는다. 우리는 왜 여성에게 더 잔인한 도덕을 요구하는가? 그리고 감정을 무기로 만든 세계에서 누가 진짜 악한가?
'문학 속 인물 분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학 속 인물 분석(33) 매그위치는 죄인인가, 구원자인가? (0) | 2025.07.21 |
---|---|
문학 속 인물 분석(32) 이아고는 타고난 악마인가, 사랑을 잃은 인간인가? (0) | 2025.07.20 |
문학 속 인물 분석(31) 자베르는 정말 악인인가? – 법과 양심 사이의 비극 (0) | 2025.07.19 |
문학 속 인물 분석(30)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는 예술을 위해 인간을 버린 괴물인가, 진실한 창조자인가? (0) | 2025.07.18 |
문학 속 인물 분석(29) 무기여 잘 있거라의 프레데릭 헨리는 사랑을 통해 무엇을 잃고 얻었는가? (0) | 2025.0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