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의 리외는 냉정한 의사인가, 시대의 양심인가?
– 절망의 시대에 침묵하지 않는 인간의 윤리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는 전염병이 창궐한 알제리의 오랑시를 배경으로, 인간이 부조리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는지를 묻는 작품이다.
주인공 리외는 그 속에서 평범한 동네 의사로 등장하지만, 전염병이 도시를 삼키는 순간부터 누구보다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한다. 그는 공포에 무너지지도 않고, 영웅적인 선언을 하지도 않으며, 단지 ‘자기 일’을 할 뿐이다. 하지만 이 ‘자기 일’이라는 것이야말로, 카뮈가 말한 실존적 윤리의 핵심이다.
그는 죽음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페스트가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사실도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환자를 돌보고, 감염된 사람들과 함께하며, 끝내 병이 물러날 때까지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킨다.
이 글에서는 리외가 단지 비감정적이고 직업적인 의사가 아니라, 시대의 비극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 ‘윤리적 인간’으로서 어떤 선택을 해왔는지를 살펴본다. 리외는 냉정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필요한 감정과 책임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리외의 냉정함은 감정의 부재가 아니라 책임의 윤리였다
리외는 소설 내내 감정 표현이 적고, 차분한 태도를 유지한다. 그는 눈물 흘리지 않고, 거창한 말을 하지 않으며, 페스트를 앞에 두고도 당황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일부 독자들은 그를 지나치게 차가운 인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카뮈가 그린 리외는 냉혹한 이성이 아니라, 현실을 가장 정확히 인식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선택하는 인간이다. 그는 죽음의 부조리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페스트는 논리도 없고, 도덕도 없다. 감염자는 예고 없이 쓰러지고, 가장 선한 이들도 죽는다. 리외는 이 현실 앞에서 신의 뜻이나 운명의 질서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의사의 일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며, 그것이 옳은 일이라는 걸 안다"고 말한다. 이 말 속에는 철학적 질문에 대한 명확한 실존적 대답이 담겨 있다. 삶이 의미 없고, 인간의 존재가 허무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외는 의미 없는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대신,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행동하는 윤리적 실천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냉정함은 방어적 침묵이 아니라, 실천으로 감정을 증명하는 성숙한 태도였다.
그는 구원자가 아닌 동료 인간으로서 곁에 있었다
리외는 자신을 영웅이나 선지자로 내세우지 않는다. 그는 누구보다 페스트의 본질을 잘 알지만, 그에 대한 해결책을 갖고 있지도 않다. 그는 단지 ‘곁에 있는 사람’으로서 살아간다.
그는 "영웅주의는 가치 없고, 오직 성실만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카뮈가 말한 ‘반反영웅적 윤리관’을 상징한다. 리외는 삶과 죽음을 초월하지 않으며, 오히려 죽음의 가능성을 늘 인식하면서도 인간 곁을 지키는 존재다.
그는 페스트에 감염된 이들을 매몰차게 치료하지 않으며, 마지막까지 인간의 손을 잡는다. 사람들의 희망이 무너질 때도 그 자리를 지키고, 절망 속에서도 체념하지 않는다. 그는 "나는 치료를 멈추지 않겠다"는 말 외에는 어떤 선언도 하지 않지만, 그 한마디가 어떤 철학적 언변보다 깊은 울림을 남긴다.
이처럼 리외는 인간을 이끌거나 계몽하지 않고, 단지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동료 인간’의 위치를 자처한다. 리외는 구원의 메시지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윤리적 연대의 실천이었다. 그는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기에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리외는 절망을 말하지 않고, 행동으로 인간다움을 지켰다
『페스트』는 결코 낙관적인 소설이 아니다. 도시가 봉쇄되고, 사람들은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가며, 신은 침묵하고, 믿음도 허물어진다. 그 가운데서 리외는 종교도, 이념도 붙들지 않는다.
그는 신의 부재 속에서도 스스로 ‘선한 행위’를 실천하는 인간이다. 카뮈가 실존주의적 윤리로 말했던 "의미 없는 세계에서 의미 있게 살기"는 바로 리외의 삶을 통해 구현된다. 리외는 세상에 질서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기에 인간이 그 공백을 메워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는 지친 몸으로 병자를 돌보고, 단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싸운다. 그는 페스트가 물러간 후에도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말은 순진한 희망을 거부하는 동시에, 인간이 반복되는 비극 앞에서도 다시 윤리적 선택을 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선언이다.
리외는 감정을 감춘 것이 아니라, 감정을 실천으로 승화시킨 인물이다. 그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물음을 남긴다. "인간은 절망 속에서 어떤 윤리를 지킬 수 있는가?" 그 대답은 리외의 말보다는 그의 행동 안에 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지만, 절망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킨 인간'이었다.
리외는 냉정한 의사가 아니라, 죽음을 이겨낼 수 없다는 현실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은 윤리적 인간이다. 그는 말 대신 행동했고, 절망 대신 책임을 선택했다. 『페스트』는 그를 통해 묻는다. 우리가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을 때조차, 어떻게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는가? 리외는 그 질문에 묵묵히 대답한다. "나는 치료를 멈추지 않겠다"는 그의 태도 속에, 시대의 양심은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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